* 이전부터 내가 좋아하던 영화들중 '햇살좋은 영화'라는 내 나름의 분류가 있는데
그 분류에 속하는 영화는 그랑블루, 지중해, 지금 말할 돈주앙, 이렇게 3개다.
밑에서 말하는 돈주앙은 가위손의 주연이었던 조니 뎁이 주인공역을 맡고
제레미 레벤이 감독한 영화이다. 원제는 'Don Juan Demarco'.

 

돈 주앙, 농담같은 진실

 

 

돈주앙, 돈환 하면 떠오르는 생각,

희대의 바람둥이,
많은 남자들의 부러움의 대상,
역사적 제비,
에로틱한 상상들,
이런 것들이 보통 떠오른다.

 

하지만 이 영화는 찐한 에로물이 아니고
그렇다고 돈주앙에대한 심각한 역사적 고증, 또는 문학적 고찰이 아니다.

가벼운 농담같이 진지하게 진실에대해 묻고 삶의 무게감에 관해 묻는다.
왜 삶은 그리도 무거운지,
왜 너무 환상적인 삶만 보면 덮어놓고 과대망상이라고 생각하는지,
왜 진실은 그래왔다는 관습대로, 또는 그래야만 한다는 당위로,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도식으로 설정되어야되는가를 묻는다.

심각하게 묻지않고 미소를 띄우면서 가볍고 유쾌하게 묻는다.

 

자살을 하려던, 자신을 돈주앙이라고 믿는 청년이 정신병원으로 실려와 은퇴를 몇일 앞둔 담당 정신과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다.
의사는 그 청년이 정신병자인지 정상적인 사람인지를 판단해야하지만 그 판단에 열중하기보다는 청년의 낭만적인 이야기에 휩쓸려들어간다.
현재 청년의 모습은 청년의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믿게 만들고 현실의 조사를 통해 드러나는 청년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초라함이 진실로 보이는 것은 이제껏 살아온 삶에서 우러나오는 뼈아픈 각성의 경험이다.
현실의 삶은 그렇게 화려하고 낭만적이고 환상적이질 못하다.

환상이 하나씩 깨져갈때마다 삶은 초라해지고 꿈이 하나씩 깨져갈때마다 삶은 좁아져간다.
너무 화려하고 환상적인 삶은 거짓으로 보인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판단은 맞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일반적인 경우가 판단에 중요한 만큼이나 예외적인 경우를 인정하는 마음은 중요하다.
어쩌면 더욱 중요하다.

관습은 어차피 미리 정해진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전해오는만큼 새롭게 변화된뒤 전해가는 것이고 진리 역시 마찮가지다.
추상적 의미의 진리라는 것은 현실속에서 꾸준히 변화해 가고 한가지로 정해져 있다해도 시대속, 환경속의 영향으로 해석에따라 다르게 보여지고 새로운 사실의 깨달음으로 수정, 보완된다.

비록 초라한 것이 진실로 보여지는 적이 많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그렇다고 하더라도 많을 뿐이지 절대적인 것은 아니고 항상 그러한 것 역시 아니다.
소수는 주로 오해받기 마련이고 예외적인 경우는 주로 논외로 치워지기 쉽다.
하지만 진실과 진리는 다수의 선택만은 아니다.

해서 만일 진실로 진실에 다가가고자하는 사람이라면 진실의 반대편을 보려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만약 진실이 너무 추악하고 초라하다면 진실을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영화 마지막의 황당한 반전에 난 매혹당했었다.
그래, 안될껀 또 뭔가?

너무 쉽게 좌절하지 말 일이다.
삶은 무겁기만 하지는 않다.
무겁기도 하고 가볍기도 하다.

가끔 삶이 참을 수 없을만큼 무거운만큼 가끔 삶은 참을 수 없을만큼 가볍기도 하다.
그럼에도 종종 삶이 무거워 보이기만 하는 이유는 단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픔만큼 기쁨을 기억속에 남겨두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픔이 주로 미완에서 발생하기 때문이고 기쁨은 대개 완결에서 발생하곤 하기 때문일까?

기억하건 못하건 상관없이 어쨋건 삶은 무겁기만 하지는 않다.

손에 잡힐 듯 밝고 맑고 따사로운 햇살, 유쾌한 가벼움, 낭만적 동화 속 이야기 같은 사랑, 칼싸움, 모험, 여행. 삶이 고달픈 사람 들에게 권할만한 영화다.

대신 영화를 볼때 이성이 감성을 몽땅 몰아내지 않도록 눈에서 힘은 좀 빼는 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