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모토 료마 (坂本龍馬)

사카모토 료마.
일본의 메이지 유신시대에 활약한 정치가랄까 혁명가랄까.

이 자를 처음 접한 것은 일본 해적판 만화 '도(刀)'에서인데 일본 원제는 '어~이! 료마(お〜い!竜馬)'.

일본의 개화기, 봉건체제가 무너지고 서구의 침략과 함께 서양문물이 쏟아져 들어오며 근대로 변화하던 혼돈의 시기에 대화와 타협을 무기로 세상을 바꾼 인물이다.

현대로 따지면 네고시에이터겸 혁명가 정도 되겠는데 (이게 말이 되나? 이 자 이전에도, 이후에도 본적 없는듯.) 민주화와 개방이란 뜻을 품고 자신의 의지를 말로써 관철시켜 나갔다고 한다. 어린시절 검을 배워 어느정도 고수였음에도 죽을때까지 검으로 사람을 베지않고 담력과 말로만 세상을 헤쳐간 특이, 대담한 인물이기도 하다.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 같이 떨어져 나가고 칼과 총이 난무하던 무자비한 시대에 말이다.

료마는 사쓰마와 쵸슈번의 분쟁을 중재하여 전쟁을 끝내 도쿠가와 막부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기르고 이를 통해 도쿠가와 막부를 해산시켰으며 일본 의회의 아이디어를 낸 장본인으로 근대 일본의 기초를 다진 인물. 그리곤 33살의 나이에 암살로 생을 마감했다.

피흘리지 않고 혁명을 이끌어내며 혁명 이후의 세상에 대한 계획이 있던 남자, 혁명이 이뤄진후 모든 관직을 마다하고 새로운 꿈을 찾아 새로운 길을 간 남자.

아래는 인터넷 어디에선가 퍼와서 (기억 안남) 약간 첨가, 편집한 글.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일본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역사를 연구하는 모든이들의 연구 대상이라고 합니다.
그는 칼 하나로 일본을 움직인 검객 '사카모토 료마'입니다.
그가 유명한 이유는 그가 그시대 최고의 검객이라서가 아니라, 칼을 찬 일개 검객으로서, 일본의 역사를 움직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도막, 대정봉환, 에도성의 무혈개성, 메이지 유신, 그리고 일본 근대화의 이 모든것이 료마 한사람의 아이디어였고, 그 아이디어대로 밟아온 일본은 현재 선진국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료마는 1835년 일본의 4대 웅번중 하나인 토사번의 어느 향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토사번의 무사는 향사와 상사로 나눠져 있었는데, 실권을 상사가 가지고 있어, 향사는 언제나 심한 차별대우를 받았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울보'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다른 아이들로부터 놀림을 당하면 몇십리되는 길을 혼자서 울며 집으로 돌아오기 일쑤였습니다. 게다가, 거미를 매우 무서워 했다고 합니다.(심지어, 거미를 보고 기절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의 이러한 걱정스러움은 날이 갈수록 더해서, 글을 가르쳐도 배우는 속도가 늦고, 경서를 가르쳐도 외우지 못할뿐 아니라 깨우치지도 못했습니다.
걱정에 휩싸인 부모님은, '글을 가르쳐도 소용이 없고, 경서를 가르쳐도 깨치지 못하니, 검술이라도 가르쳐보자'며 도장에 입문시켰습니다.
하늘의 도우심이었는지, 료마는 검술에서 특이한 재능을 나타내게 됩니다.
료마 앞에서 무식하다고 놀리고 뻐기던 친구들이 그와 죽도 대련하면서 판판이 나가떨어졌습니다.
료마의 검술이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발전을 이룩하자, 부모님들은 어린 나이의 료마를 에도의 소치바 도장에 유학을 보냅니다.

당시, 에도에는 두개의 북진일도류 도장이 있었습니다. '기술의 치바'로 불리던 치바 슈사쿠가 운영하던 켄부우칸과 치바의 동생인 치바 사다키치가 운영하던 도장이 그것입니다.
사람들은 두 도장을 구분하기위해 치바 슈사쿠의 도장을 '대치바 도장'이라 부르고, 사다키치의 도장을 '소치바 도장'이라 불렀습니다. 기술로는 소치바가 대치바보다 낫다는 평가도 받았습니다.

료마의 검에대한 재능은 소치바 도장에서도 빛을 발하여 도장의 수련생들을 통솔하는 '학생장'이 됩니다.
검객으로서 료마의 명성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그가 1858년 토사번이 개최한 검술대회에서 1등을 하고, 뒤이어 렌페이칸(신토무넨류 도장)이 주관한 검술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면서 부터였습니다.
즉, 그는 검술로 전국을 휩쓸어버린 것입니다.

그의 부모님은 료마가 천하제일검이 되었으니 낙향하여 도장을 열어 한평생 편안히 살게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습니다. 료마는 그런 안정된 생활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일본을 움직일 생각따위를 한 것은 아닙니다. 평범한 삶을 싫어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일본을 움직이는 검객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카쓰 카이슈 암살기도 사건에서부터입니다.

소치바 도장은 존황양이 사상을 옹호하고 있었습니다.

존황양이 사상이란, 실권자가 천황, 쇼군 둘로 나뉘는데 천황은 명분상. 실제정권은 쇼군이.. 그러니까 천황에게 권력을 돌려주자. 이게 존황, 양이는 서양 오랑캐들을 몰아내자.

그래서 모든 무사는 도막파에 속해 있었습니다.
어느날 료마와 사다키치의 아들인 치바 츄타로는 충격적인 말을 듣습니다.
'막부 가신중에 카쓰 카이슈라는 놈이 있는데, 그가 서양식 해군을 만들려고 획책하고 있다!'
그 말에 츄타로는 격분합니다.'뭐?! 일본의 해군을 오랑캐로 바꿔? 이걸 오늘밤 베어버리겠다! 료마! 같이 가 주겠지?!'
료마는 학생장이었기 때문에 존황양이에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존황양이를 따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막부의 처신에 문제가 있다. 뭐, 그러니까, 도막 사상은 그냥 무사의 에티켓 정도....'가 그의 생각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니까, 츄타로는 카쓰 카이슈를 벨 생각으로 찾아갔고, 료마는 그냥 친구따라 강남가듯이 졸졸 쫓아간 격이었습니다.

카쓰 카이슈는 츄타로를 보고 첫눈에 자신을 암살하러 온 것임을 직감합니다. 그리고, 츄타로의 도막 사상을 꾸짖기 시작합니다.
'그래, 막부를 타도하여 새시대를 만들겠다는 것은 좋다. 그러나, 서양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막부를 쓰러트리고 새 시대를 여는것 못지않게 서양을 배워 일본도 강해져야 한다. 그러한 강함을 가지기 위해서는 해군이 강해야 한다! 즉, 도막과 해군이 같이 가야 일본이 강해진다!'

당시까지만해도 도막파에서 서양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은 일부 지도자의 생각일 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도막이 선결과제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대다수의 도막파 무사들은 일본의 미래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도막에만 열정을 쏟고 있을 때였습니다.

카쓰 카이슈의 말에 료마는 크게 감명을 받습니다.
강한 나라로서의 일본의 미래와 '배가 나라의 운명을 바꾸는 열쇠가 된다.'는 생각은 바닷가에서 배를 보며 자란 료마를 강하게 자극했습니다.
료마는 그자리에서 카쓰 카이슈의 제자로서의 입문을 청하게 되고, 다음날부터 해군 훈련소를 설립하고 운영해나가기 시작합니다.
어젯밤 도막파 무사들의 학생장이었던 사람이 다음날 아침 막부의 해군 훈련소 실무자로 둔갑하자 도막파 무사들은 격분합니다.
료마의 특이한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막부의 개'/'배신자'라는 오명은 보통이고, 암살계획까지 수립하여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 됩니다.
그러나, 료마는 자신만의 도막론을 꿈꾸며 해군 훈련소를 열심히 운영해 나갑니다.

료마의 도막론은 대충 이랬습니다.
'일본이 오랑캐의 위협을 받는 이유는 힘없는 막부때문이다. 게다가, 번 중심으로 흩어진 일본은 힘을 모을 수 없다.
따라서, 막부를 쳐부수고 천황 중심의 나라를 건국해야 한다.(여기까지는 도막론)
그러나, 천황 중심의 나라를 건국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력이 강해야 한다. 국력은 돈, 돈을 버는 방법은 무역, 무역을 잘 하려면 해군력이 강해야 한다.(이건 개국론)'

그렇게 해군 훈련소를 운영하던 중 스승인 카쓰 카이슈가 막부에의해 근신처분을 받게 됩니다. 료마는 해군 훈련소를 정리하고 사쓰마의 후원을 받아 '가메야마'라는 해운회사를 설립합니다.
료마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각 번을 돌아다니며 제후들을 설득하여 가메야마에 투자하게 합니다. (이것이 동양 최초의 주식회사가 됩니다. 그리고, 이후 료마의 친구가 넘겨받아 오늘날 미츠비시 그룹의 모체가 됩니다.)

료마의 생각은 이랬습니다.
투자 받은 돈으로 서양 기선을 사고, 서양 기선으로 무역을 하여 번 돈의 일부를 투자자들에게 돌려줍니다.(오늘날의 지분분배)
남는 돈으로 도막파에 무제한으로 서양무기를 공급해(무기밀매)
도막과 좌막사이의 힘의 균형을 무너뜨리면, 전쟁이 나지 않고 막부가 무너진다는 계산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날이 오기전에 문제가 터집니다. 바로 이케다야 사건입니다.

이케다야 사건은 왜 일어난것인가.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초슈번이 도막을 외치는 관계로 막부에 의해 쫒겨나고 나라의 적으로 몰렸습니다.
그런데 천황을 데려오면 정권은 초슈쪽으로 넘어가죠(명분상)
그래서 당시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에 천황이 살고있었는데 교토에 불을 지르고 사람들이 우왕좌왕 혼란할때 천황을 데리고 초슈쪽으로 가는거죠.
하지만, 당시 그 작전을 짜고 회의의 우두머리였던 미야베가 입이 싸서 그 말을 한, 두사람에게 말하고 다녔죠. 그것이 결국 신선조의 국장인 곤도 이사미의 친구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고 술자리에서 곤도에게 말해버렸다죠.
그래서 작전 실행 바로 전날밤 이케다야 라는 여관에서 회의를 하는데 신선조가 덥친거죠.
50명가량의 지사가 죽고 미야베는 할복을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막부의 쵸슈번 정벌 전쟁이 발생하고 1차 전쟁으로 쵸슈번은 괴멸상태에 빠져있었습니다.
막부는 2차 정벌로 쵸슈번을 초토화 시킨다는 계획이었고, 내부 쿠테타로 간신히 정권을 되찾은 존황양이파는 평민들을 모아 군대를 조직해 최후의 결전에 임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도막파의 웅번은 셋, 쵸슈, 사쓰마, 토사 였습니다. 그러나, 존황양이파가 정권을 잡고 도막을 추진하는 번은 쵸슈번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사쓰마와 토사의 존황양이파는 하급무사뿐이었고, 사쓰마는, 일본 역사에서 언제나 그랬듯이, 일의 끝을 지켜보며 중립을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쵸슈가 무너지면 도막의 선봉은 사라지고, 일본은 다시 막부시대로 돌아갈 판이었습니다.

료마는 이 사실을 직시하고, 사쓰마와 쵸슈의 중재에 나섭니다. 서로 원수지간인 두 번을 료마는 용케 설득시켜 하룻밤사이에 친구로 만들어 버립니다.
'두 사람이 서로가 등을 돌리고 있으면 언제까지고 일본의 새벽은 오지 않아요. 사쓰마는 기아에 허덕이고 있고, 쵸슈는 막부의 정벌에 위태롭습니다. 서로가 조금씩만 도우면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어요.'
결국, 쵸슈는 기아에 허덕이는 사쓰마에 대량의 쌀을 공급하고, 사쓰마는 만일을 위해 사두었던 서양식 총포를 상당량 쵸슈에 제공합니다.
그리고, 사쓰마와 쵸슈는 도막 동맹을 결성합니다. 이날이 1866년 1월 8일이었습니다.

쵸슈와 사쓰마는 힘을 합쳐 천황궁이 있는 교토로 진격하고, 교토의 신선조를 비롯한 좌막파 단체들은 결전을 준비합니다.
료마는 '일본인들끼리 죽고 죽이는 내전은 나라의 힘을 약화시킨다.'는 생각에 전쟁의 씨앗을 없애버릴 계획을 추진합니다.
그는 같은 고향 출신의 막부 중신 고오토쇼지로를 설득시키고, 쇼지로의 설득으로 막부의 쇼군은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천황에게 고하게 됩니다.

대정봉환(大政奉還): 1867년 일본 에도 바쿠후[江戶幕府]가 천황에게 국가 통치권을 돌려준 사건

료마는 또한, 에도성의 함락을 염려하여 스승 카쓰 카이슈를 설득하고, 카이슈가 막부를 설득하여 에도성을 무혈개성하기에 이릅니다.

'강한 나라, 일본'을 꿈꾸던 료마는 도막 이후의 세상을 미리 마음속에 만들어 놓고 있었습니다.
'대정봉환으로 정권이 천황에게 돌아온다고 해도 천황이 직접 정치하지는 않는다. 누구도 그걸 바라지 않는다. 결국, 지금의 도막 동맹이 정권을 잡게 될 것인데, 지금의 체제로 간다면 신시대는 제2의 막부 세상이 될 수도 있다.'

쇼군이 천황에게 대정봉환을 고하던 날 밤, 료마는 도막파 지도자들을 모두 불러모아 새시대의 청사진을 제시합니다.
그 청사진에는 내각제, 헌법, 정부, 국회등이 있는 서양식 국가체제가 제시되어 있었고, 각 지도자들이 어떤 관직에서 어떤 일들을 해야 할 것인지가 모두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청사진은 모든 도막파 지도자들의 중심 생각이 되었고, 료마의 청사진은 이듬해 '메이지 유신'으로 현실화 됩니다.
그리고, 료마의 청사진대로 움직여 나간 지도자들은 훗날 유신지사로 불리게 됩니다.

'존황은 달성되었다. 그러나, 양이로는 일본은 강해지지 않는다. 이제는 오랑캐를 배워야 한다.'
이 생각은 스승 카쓰 카이슈의 생각이자 료마의 생각이었고, 이또한 유신지사들에의해 실행되어 일본은 강대국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관직을 분배해주고 새시대를 조각한 료마였지만, 정작 자신은 어떤 관직도 마다했습니다.

'나는 틀에 박힌 관리 생활은 맞지않아'
'그럼, 앞으로 무엇을....?'
'글쎄,,, 세계 무역에 뛰어들어 볼까나?'

자신의 구상대로 일본이 새로운 나라로 거듭난 시점에서, 료마는 또다른 그 무엇을 꿈꾸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인박명이라나요? 그는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자객에의해 33세의 나이에 암살당합니다. 그때가 메이지 유신 이듬해였습니다.

그의 죽음 이후, 그에대한 평가는 엇갈린채 역사는 흘러갔고, 학자들의 사고방식이 도막과 좌막의 흑백구도를 벗어난 오늘날에 와서야
제대로 평가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료마의 생각이 얼마나 시대를 초월했는지 알 수 있겠죠?)

그러나, 모든 역사가 료마의 뜻대로 움직여주지는 않았습니다.
료마는 내전은 강한 일본으로의 적이라고 생각했기때문에 막부 정벌을 막으려 했습니다만, 천황 칙령을 얻은 사쓰마/쵸슈 동맹은 아이즈를 비롯한 좌막 번들에대한 토벌 전쟁을 시작합니다. 그것이 무진전쟁입니다.

료마는 한평생 자신의 신념을 따라 살았고, 그의 삶과 노력에 따라 일본의 미래는 구체화 되었습니다.

료마의 일기장에는 이런구절이 있습니다.

'만일,이 세상 모두가 선한 사람이라면, 나 혼자 악인이 되겠다.'

료마의 삶의 방식을 잘 보여주는 예화가 있습니다.

어릴적에 도장에서 수련중이었을때, 하루는 비가 왔습니다. 수영 사범이 '오늘 수영 연습은 없다.'라고 말하자, 료마는 곧장 강을 향해 뛰쳐나갔습니다.
수영사범이 '료마! 오늘은 수영 연습이 없다고 했다!'라고 말하자, 그때 료마의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비에 젖으나 강물에 젖으나 한가지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