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꽤나 오래전에 썼던 글이라 현재상황과 안맞는 내용이 있을수도.

 

파괴와 건설의 미학, 테트리스

 

 

내가 테트리스라는 오락을 처음 본 것이 아마 고등학교때였을 것 이다.
동네 오락실에서 였는데 새로 들어온 오락기계의 전면 상부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소련에서 만든 세계 최고의 게임! 테트리스'.

그당시에 내게 소련이라면 007영화에 나오는 악당들의 나라,
그리고 모든 악의 총체인 빨갱이들의 주 거주지이며 총본산 정도였는데
(이때는 전교조가 없었다.)

그 나라에서 만든 오락이 들어왔다는 것도 신기했고
그 엄청난 자부심의 문구 '세계 최고의 게임'이라는 말에도 혹했다.
그래서 그 다양한 사각형들이 왔다갔다하는 첨보는 방식의 오락을 주시했었다.

한데 몇명이 호기심으로 하는 것을
뒤에 서서 지켜보다가 내가 직접 한번해보고 나서는
실망해버렸다.

이건 용감한 기사도 없고, 공주도, 악당도,
불을 뿜는 용도, 괴물도, 멋진 우주선도, 로보트도,
흥미진진한 스포츠도 없었다.
모험도 없다.
싸움도 없었고
파괴라고 해봐야 줄이 맞았을때
번쩍번쩍하고는 그 맞은 줄이 사라져 버리는 것 뿐이다.

그냥 사각형들이고
내려오고
그것 뿐이다.

'뭐야 이건?
이따위 과장광고가 다 있나.
누군지 참 이런 시시한 오락을 만들어놓고는
팔아먹으려고 애 많이도 썼군.

소련을 끌어들이질 않나
세계최고라는 막강한 수식어를 다 써먹질 않나..
속았다.'

이런식으로 분개했었다.
한데 이 엉터리같은 과장광고의 단순하고 한심한 오락은,
위와같은 나의 푸념과 함께 조만간 정리되고
쓰레기장으로 갈 줄 알았던 이 테트리스는 쉽게 오락실을 떠나지 않았다.

미국의 많은 컴퓨터 관련 연구자들이
연구에 지장이 갈 정도로 테트리스에 중독되다시피 빠져
시간을 소비했기에 소련에서 미국의 컴퓨터 연구를 방해하기위해
테트리스를 만들어 전파했다는 한심한 농담같은 이야기가 풍문으로 떠돌았고
그때까지만 해도 남자들만의 공간으로 보였던 오락실에
여자들을 끌어들였다.

그뿐 아니라 이 구닥다리 오락은
내가 처음 봤던 테트리스 그대로
지금도 어느 오락실이나 하나 이상씩은 구비되어 있으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동전을 꾸준히 집어넣어 즐기고 있다.

웃기는 일이다.
컴퓨터가 가전제품이라고 불릴정도로 널리 보급된 지금,
컴퓨터용으로도 수많은 테트리스들이 만들어지고
원하기만 하면 통신으로도 (다른 오락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에 받아 집에서도 지겨워 죽도록
공짜로 (전기세를 제외하면) 할 수 있는 지금,

 

테트리스는 오락실 구석에서 꾸준히 고객을 불러들여 꾸준히 동전들을 먹어대고 있다. 게다가 이럴수가. 나도 중독되다시피 테트리스에 빠져버렸다. 왜였을까? 이 괴상한 테트리스라는 오락을 한번 돌아보자.

 

1. 게임의 룰이 단순하고 부담없어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다. (만만해보인다.)

2. 조작법은 쉽지만 속도때문에 어느정도의 한계가 있다. 갈수록 어려워져서 끝까지 가기가 정말 어렵다. (만만하지 않다.)

3. 바둑의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 만큼이나 엄청난 변수로 비슷한 경우는 있어도 똑같은 경우는 없다. 할때마다 다르다. 게다가 끝이 없기에 이 게임을 내가 정복했다는 성취감보다 아쉬움이 남게된다. (지겹지 않다. 만족하기 힘들다. - 50판까지 가서 이젠 테트리스계를 은퇴해도 될꺼야 하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 어디선가 동네 꼬마가 나타나 101판을 한다.)

4. 기본적인 머리를 써야하지만 결국엔 숙달과 감각이다. (머리만으론 엄청난 속도를 감당못한다. 꾸준한 동전 투자가 필요하다.)

5. 오락이 왠지 지적으로 보여서 남들에게 덜 쪽팔린다.

6. 많이 하면 신속한 조합능력과 빠른 판단력이 생기지 않을까하는 착각도 든다.

7. 중독증에 걸린 고정 고객이 있다.

8. 신세대 오락에 적응못하는 구세대 고객이 있다.

9. 신세대 오락에 사람들이 비기를 기다리다 지쳐서 앉은김에 테트리스를 하는 신세대 고객이 있다.

10.도대체 사람들이 아직까지 이 오락을 하는 이유가 뭘까하는 궁금증에 다시해보는 어리버리한 고객이 있다.

 

따져보니 가능성이 있었다.
또, 그 없는 것 많은 테트리스에는 많은 감정이 있다.

테트리스에는 짜증이 있고 (기다리는 사각형은 안나오고 엄한 다른 사각형들만 나올때), 긴장이 있고 (하나의 세로줄을 남겨놓고 아슬아슬 쌓을때), 쾌감이 있고 (기다란 빨간 사각형이 나와 한번에 4개의 줄이 번쩍이며 지워질때), 아픔이 있고 (기껏 하나의 세로줄을 남겨놓고 쌓았는데 그걸 정사각형이 딱 막아버릴때), 초조함이 있고 (사각형들의 무더기가 천장에 거의 다가갈때), 아쉬움이 있고 (결국 끝에는 도달하지 못하므로.), 기타등등의 감정이 있다.

 

 

게다가 테트리스는 단순해 보이는 속에 많은 깨달음을 던져주기도 한다.
테트리스는 사회과학이다.
테트리스를 잘하기 위해서는 사각형 하나하나의 외모와 성격을 파악해야한다. 뿐만 아니다. 개개 사각형들간의 상호 관계에 대해 파악을 해야한다. 뿐만 아니다. 환경과 사각형의 적응관계를 파악해야한다. 하나의 사각형이 필요로하는 자리를 찾아주어야하고 다른 사각형들과의 연계를 생각해야한다. 축적된 사각형들의 과거를 돌아보아야하며 다가올 미래의 사각형에대한 예측을 하고 대비를 해야한다. 문제가 쌓이는대로 해결을 할 것인지 도박을 걸고 문제를 쌓아두었다가 한번에 해결을 할 것인지 판단을 내려야한다.

갈수록 빨라지기만하는 사각형의 떨어지는 속도는 인류 진보의 역사를 닮았고 파괴와 건설이 같이 공존한다. 축적되지 않으면 지워지지 않고 지우지 않으면 더이상 축적하지 못한다. 앞으로 나올 사각형이 어떤 것일지 기껏해야 한개 이상을 예측할 수 없으며 자신의 부실한 건설물로 몰락을 예감할 수 있기도 하고 엄청난 노력으로 회복되기도 한다. 항상 예측할 수 없는 사각형들이 나오지만 그 각각 사각형들의 출현 빈도수 통계를 내보면 사각형들이 출현한 빈도수는 거의 크게 차이지지 않고 비슷하다. 한번의 실수가 얼마나 많은 재앙을 가져오는지를 보여주기도 하며 하나하나의 사각형 들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사라져가고 역사가 끝이 없듯 테트리스도 끝이 없다. GAME OVER만이 있을 뿐이다.

테트리스는 매력적이고 (마구 끼워 맞추기도 잘하는) 난 중독자가 됐고 '세계 최고의 게임'이라는 터무니 없는 과장광고같은 문구는 이제 그렇게 과장되어 보이지만은 않는다. 테트리스는 오락계에 많은 변화를 불러일으켰고 수많은 버전업을 했고 (3차원 테트리스, 얼굴 테트리스 등) 아류들을 (헥사같은, 게다가 헥사는 또 다시 아류를 만들어냈다.) 탄생시키고 만평의 소재로 등장하기도 하고 우스개의 소재로 쓰이기도 하며 연구자의 연구 시간을 뺐고 소련의 민속춤에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죽어라고 화려한 그래픽과 환상의 사운드, 효과음, 엄청난 프로그래밍으로 컴퓨터 오락을 만드는 제작자들의 뒷통수를 때리고 중독자를 만들어내며 현재까지 꾸준한 이용자들을 가지고 있다. 이 단순하고 용량 작고 값싼 테트리스가 말이다.

테트리스는 단순함이라는 결점을 대중성의 획득이라는 장점으로 바꾸어냈고 용량이 작은 것과 값싼 것을 보급의 활성화라는 장점으로 바꾸어냈다.

테트리스에서 배우자.
그리고 중요한 것.
그렇다고 테트리스만 하고 있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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